잊힌 이름들, 이야기되지 못한 아픔들, 그럼에도 아픔을 간직한 이들이 서로에게 내어 주는 곁. 한정현 작가의 소설 『줄리아나 도쿄』를 처음 읽었을 때, 에디터 아키는 하얀 눈밭 아래 묻힌 이름들과 아픔들을 마주한 기분이었어요.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잡을 때, 마치 읽는 사람에게도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죠. 시공간을 교차해서 역사적으로 잊힌 존재에게 사랑의 온기를 불어넣는 작가, 한정현. 그의 방으로 함께 가볼까요?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한정현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낯선 시공간의 잘 몰랐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오키나와 국가 폭력의 피해자, 여성국극 배우, 기지촌 여성, 빨치산 생존자 등 우리 곁에 있었지만 역사에서는 조명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돼요. 동시에 이는 퀴어, 여성, 이민자 등 소수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한정현 작가는 희미하게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밝게 비추어 우리 곁으로 데려와 줘요.
사랑과 연대, 그로 인한 용기
비슷한 상처를 간직한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지지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다행인 일이 있을까요? 한정현 작가의 소설 속에는 동반자로서 함께하며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해요. 이들은 서로의 깊은 아픔을 이해하고 서로를 소중하게 대하면서, 매듭지어야 하는 일에 각자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꾸준한 '덕질'의 기록들
올해 책읽아웃과의 인터뷰에서 한정현 작가는 "꾸준한 덕후의 삶을 살아왔"다고 했어요. 탐정소설과 추리소설, H.O.T 토니와 샤이니 태민 등 아이돌은 물론이거니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역사와 인물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좇아왔어요.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는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봐야 한다."는 문장도 있지요. 그가 좋아해서 좇은 것들이 그의 소설 속 세계로 구현되는 것 같아요.
아름다운 흰 눈 아래 폭력과 상처
한정현 작가의 이름을 주목하게 만든 첫 장편 소설이에요. 사랑하는 이의 폭력으로 상처 받은 인물들이 부산과 도쿄, 오타루를 넘나들며 나누는 우정의 이야기인데 그렇게만 이야기하기엔 부족해요.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섬세한 감정의 흐름이 빛나고, 중심 인물과 서사 외에도 다양한 인물과 서사들이 함께 등장하거든요.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며 연대하는 인물들이 "너는 나의 김밥 끄트머리야."라고 말할 때의 감동은 쉽게 잊지 못할 거예요.
올해 초 출간된 한정현 작가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이에요. 독특하게도 추리소설처럼 미스터리한 단서를 더듬어 진실을 찾아가는 방식을 택했어요. 사고로 기억을 잃고 환상통을 겪는 연구자 '설영'과 아이를 잃은 성형외과 봉직의 '연정'에게 어느날 '셜록'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없는 내용의 메일이 각각 배달돼요. 메일의 실마리를 풀면서 거기에 얽힌 역사적 사건와 사회 문제가 함께 이야기돼요. 흥미로운 방식으로 잊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이에요.
"채널예스 칼럼 <한정현의 영화적인 순간>을 쓰면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전보다 더 많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아피찻퐁의 영화들을 보면 마치 윤회하듯 사건들이 반복되고 그것이 연결되는데 제가 생각하는 역사의 속성이나 예술의 속성 아니, 다 떠나서 삶의 속성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저 혼자 기뻐하고 있습니다(?)"
"약 14년째 함께인 '곰태민'이라는 아이인데요. 원래 이름은 토니였어요. 제가 클럽 H.O.T죠. 그 다음엔 프란디에. <태양의 탑>이라는 작품에서 덕질하던 캐릭터죠. 그리고 곰태민이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제가 뉴질랜드를 떠나올 때 이른바 Five Asian Girls(저 포함)라고, 저와 친했던 네 명의 아시안 여자 친구들이 선물로 준 거에요. 비 오는 날 네 명의 친구들이 당시 제가 살던 집까지 우산 씌워 데리고 왔어요. 뉴질랜드를 떠나올 때 기내식도 먹여가며 데리고 왔습니다. 책은 버려도 이 아이는 못 버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