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수선처럼 책을 수선하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 '재영 책수선'은 그런 상상을 실현한 공간이에요. 책이 상하지 않도록 북향에 자리한 연남동 작업실. 그곳으로 온갖 사연을 가진 책들이 모여듭니다. 여행지에서 산 책, 결혼 앨범, 어머니가 생전에 아끼던 도안집. 사랑을 받은 만큼 책들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망가져 있어요. 재영 작가는 그런 '사랑의 흔적들'을 수선해서 책에 새 생명을 불어 넣습니다. 한 권의 책을 위해 여러 가지 신기한 공구들이 준비된, 따뜻한 작업실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복원이 아니라 '수선'
"책 수선은 어디에 분류하면 돼요?" 작업실을 열기 위해 세무서에 갔을 때, 재영 작가가 받은 질문이에요. 아직 낯선 직업을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다 그는 '수선'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복원해 주세요"라고 말하지만 책 수선은 원본으로 돌려놓는 것에서 끝나지 않아요. 의뢰인의 사연을 듣고 그 기억에 맞게 장정, 표지, 색깔까지 바꿔나가는 과정은 마치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렇게 완성된 책을 내밀 때, 작업실은 조용히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친구를 다시 만나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망가진 책이 너무 아름다워서
"망가진 책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왜 책 수선가가 되었냐는 질문에 재영 작가는 늘 이렇게 답합니다. 원래 파인아트와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미국 유학시절에 도서관의 책 보존실에서 일하게 됩니다. 꼬박 하루 4~6시간 동안 책을 수선해야 하는 나날이었지만, 여러 가지 형태로 망가진 책을 보는 게 그렇게 흥미로웠대요. 그곳에서 가위질과 풀질부터 다시 배우며 작가님은 책 수선가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채널예스 인터뷰)
낙서하고 접으며 책과 친해져요
책 수선가는 왠지 책을 깨끗히 볼 것 같다고요? 재영 작가는 스스로 '누구보다 책을 험하게 보는 사람'이라고 말해요. 흔히 책을 아낀다고 하면 깨끗이 보관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그건 우리의 경험을 제한하는 것이라 생각한대요. 자유롭게 낙서도 하고 손때도 묻히면서 점점 주인을 닮은 유일한 책이 되어간다고요. 그래서 그는 책을 즐기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책의 물성을 경험하는 행사를 기획하기도 하고 유튜브 채널에 종이를 찢는 소리를 올리기도 합니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책이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듣고 냄새 맡고 만지는 물건임을 깨닫게 돼요.
책에 담긴 추억이 오래 빛날 수 있도록
한 권의 책을 수선하기까지 약 49단계를 거친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긴 과정 동안, 재영 작가는 책 주인에게 말을 거는 마음으로 책을 다룬다고 해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 오드리 헵번의 블랙 미니 드레스 같은 표지를 입혀주고, 오래된 만화 전집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밤하늘을 닮은 북케이스를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책을 주인의 품에 떠나보내고 나서도 종이 조각이나 책에 눌려 죽은 벌레를 함에 넣어 간직한대요. 그런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추억이란 소중히 여길수록 오래 빛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에겐 그 당시엔 시큰둥하다가 몇 년이 지나 뒤늦게 혼자 크게 뒷북을 치는 습관이 있습니다. 레드벨벳의 '싸이코'가 그랬고,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과 <안녕, 프란체스카>가 그랬어요 (사실 훨씬 더 많아요). 그러다 요즘엔 엑스파일에 빠졌어요. 그동안 제가 이 드라마에 어느 정도로 관심이 없고 무지했냐면, 멀더가 여자 주인공이고 스컬리가 남자주인공일 거라 생각했고, 그 유명한 음악이 엑스파일의 오프닝 곡인 줄 이번에 처음 알게 됐어요. 거의 30년 전 드라마라 지금 보면 많이 유치하고 어설픈 CG도 많고 내용도 빤한데 저는 그래서 더 좋습니다. 적당히 덜 무서워하고 덜 긴장하면서 봐도 되니까요. (제 생각엔 이 드라마에선 오프닝이 제일 무서운 것 같아요.) 그리고 스컬리가 너무 멋있어요."
"언제부턴가 하루의 시작에 커피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커피의 맛도 중요하고요. 그런데 문제는 저는 맛만 따질 줄 알지, 그만큼 맛있는 커피를 내릴 줄 아는 재주는 없다는 겁니다. 제가 내린 커피를 마실 바에는 보리차 티백을 우려내 마시는 게 나을 정도니까요. '아로마보이'가 최상의 맛을 만들어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저보다는 훨씬 더 나은 맛으로, 그것도 늘 동일한 퀄리티로 커피를 내려준다는 게 하루의 시작에 위안이 돼요. 그게 아니었으면 저의 하루는 좀 더 (아니, 많이) 멍했을 거예요."